아치의 노래, 정태춘

나는 뭇 사람들이 정태춘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정태춘은 훌륭한 예술가이다. 포크 가수로 분류 되지만 그렇게 함부로 분류할 수 없는 정태춘만의 장르가 있는 예술가이다. 내가 정태춘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70년대 말 잠깐 인기를 끌었던 포크 가수를 생각하며, 아저씨스럽다고 한다면 정태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의 시적인 가사를 좋아한다. 그의 가사는 새겨 듣고 음미할수록 빠져든다. ‘저 들에 불을 놓아’의 가사는 농촌 풍경을 느린 호흡으로 묘사하고 있다. 찬찬히 듣고 있으면 한 편의 풍경화를 감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양단 몇 마름’과 같은 노래는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의 정서를 감히 공감은 못하더라도 살짝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이 노래를 고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다.

내가 정태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고 나는 그를 민중가요 가수로 생각했다. 집회 때마다 단골 손님으로 나오셨고,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 뒤적이다 보면 자주 접하는 가수였다. 간혹 그가 집회 때, ‘이전에 촛불이나 북한강에서와 같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라는 멘트를 할 때, ‘아 민중가요 부르기 전에는 말랑한 가수였구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평범한 민중가요 가수로 묶는 것 또한 맞지 않다. 80년대 말 이후 그의 노래가 직설적이고 과격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노래는 ‘조국과 청춘’, ‘꽃다지’처럼 선동적인 요소는 없다.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대작이고 명작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 위치에서 자신의 수단으로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지금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그 누구도 정태춘에게 빚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권리들이 많은 선배들의 싸움의 결과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만큼은 온 시대가 정태춘 한 사람에게 빚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이다.

정태춘은 옛날 가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창작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2012년 발매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2019년 12집 ‘사람들 19’는 현대적 감각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태춘이라는 가수의 목소리는 노년에 접어 들면서 더욱 매력적인 음색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이 그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2022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런 영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영화와 함께 미니 콘서트를 연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접하게 되었다. 짧은 콘서트라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의 더욱 완성 되어 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 내년에 앨범을 또 낸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안양 부산 무박 종주 후기

2년 전 – 장거리는 안 타나?

약 2년 전, 2021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싸 안양방에 열심히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중간 보급지에서 샤콘느 형님이 물으셨다.

“압지는 장거리는 안 타나?”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장거리 타는 거 좋아합니다. 200km 정도는 가끔 타지요.”
“아니, 장거리는 안 타냐고..”
“??????”

보통 사람이 탈 수 있는 한계가 200km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옆에 있던 소가 거들었다.
“조만간 안부 한번 올릴게요.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안부가 뭔가요?”
“안양 부산이요.”
“아. 국토 종주하는 거군요? 보통 2박 3일 하죠?”
“아뇨. 우리는 당일치기 해요.”

뭐야. 이 사람들… 이상해.
21년 10월에 소의 안부 벙이 올라 왔으나, 아직 코로나 시국이고 해서 참가자가 부족으로 성사 되지 못했었다. 어차피 나는 참가할 엄두를 못 냈었던 때였다.

2개월 전 – 훈련의 시작과 추노

23년 7월 중순. 이번에는 쇼님(소님 아니고)의 안부 계획이 공지 되었다. 진짜 ‘장거리’에 굶주렸던 사람들이 모여 훈련이 시작 되었다. 나는 참석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부러워하고만 있는 와중에, 다들 체계적으로 거리를 늘려 가며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2차 훈련이 끝나고 3차 훈련 즈음에 상황이 바뀌어서 슬쩍 중간 합류 가능을 물었더니 고맙게도 받아 주셨다. 막상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훈련량 부족인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이 정도 뭐 금세 따라잡을 줄 알았다. 올해 마일리지가 되는 편이니까 잘 될 거다 생각했다.
3차 훈련, 서울 300 코스. 진심으로 라이딩 중 토할 뻔 했다. 이거 큰일이다. 훈련 상태가 다들 장난 아니다. 훈련량도 부족한 주제에, 살살 끌어 보고자 교만했었다. 살아 남는 것을 목표로 수정. 훈련량을 추노하기로 한다.

D-7

다급한 마음으로 몸 관리에 들어간다. 하필 비가 와서 실전 훈련이 안 된다.
주말 동안 즈위프트 100km 1회, 160km 1회로 훈련했다. 이것으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까…
술도 안 마시고, 일도 잘 안 하고, 긴장 타면서 몸관리를 했다. D-5일부터 기상 시간을 1시간씩 앞당겨 22일은 새벽 3시 기상했다. 멍때리다 아침 회의 안 들어간 건 비밀.
D-3일부터는 탄수화물을 달고 살았다. 살아야 되니까, 최선을 다해 먹었다. 결과는 D-1일 평소 몸무게보다 3kg 증가. 원래 고무줄 몸무게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로딩 됐겠지.

D-Day 새벽 01:30 – 와이프 찬스를 쓰다

라이딩의 성패는 모닝 경량화에 있는 법. 처절하게 실패했다. 0%.
비우지는 못했지만 다시 피자와 스파게티를 입에 처 넣는다. 살아야 되니까…
모임 장소인 인덕원까지는 집에서 자전거로 22km 정도이다. 평소 주말 라이딩 같으면 그냥 자전거 몰고 오겠지만, 생존이 목표이므로 와이프 찬스를 썼다. 01:50 와이프를 깨우고 차에 자전거를 싣고 인덕원을 출발. (마눌님께 충성! 충성! 충성!)
02:30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의 서포터 꾸숑 형님과 도채가 와 있다. 2등.

자전거는 못 타도 집합은 빨리

“이 순서대로 부산 들어갈 거다!” 꾸숑형님 말씀해 주셨지만, ‘형님 저는 오늘 겸손한 라이더입니다.’라고 생각했다.
다들 긴장하셨는지 집합 시간 한참 전에 도착하시고 (이 정도 거리는 껌이신 봄날 형님만 여유 있게 딱 맞춰 오심) 번짱 쇼사마님의 간단한 브리핑 후 03:00 정시 출발하였다.
드디어 Grand Depart!! 2년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무리에 내가 끼게 된 것이다.

13명 모두 정시 도착, 정시 출발
Grand Depart!

안양에서 여주까지.
75km.
03:00 출발. 05:45 도착.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아직 도심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소의힘, 쇼사마, 레이닝, 요나스 등 강력한 말들의 안정적인 리드로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이 정도 페이스면 딱 좋다. 완주할 수 있겠다. 자신감도 좀 생기지만 이러다가 오버하면 큰일이니 흥분하지 않도록 한다.

꾸숑 형님의 서포트 덕분에 더욱 차량 위협은 크게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길이 어두울 때 상향등으로 앞을 비춰주는 센스까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꾸숑 형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린 모양인데, 그 이후로 팩을 놓치신 모양이다. 게다가 길까지 잘못 들어서 결국에 합류한 지점은 1차 보급지인 여주 휴게소였다.
여주 휴게소까지는 수월하게 온 편이다. (당시에는 힘들었으면서 지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글로 쓰니까 75km가 순식간이구나. 그러니까 자전거 또 타러 나가지.)

보급지에서 파랑나사는 똥참치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경량화를 성공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급은 생략한다. 봐주는 거 없이 보급 못했다고 해도 그냥 출발한다. 그렇지만 조금 부럽다. 보급보다 경량화 성공이 이득인 것 같다.

토막 상식: 참치는 멸치와 반대로 덩치 큰 라이더를 말한다. 참치는 의외로 빠르다.

파랑나사는 어디에?

여주에서 조령까지.
82km, 누적 157km.
06:00 출발. 08:50 도착.

기온이 올라가 주유소에서 바막을 벗고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와중에 누군가는 2차 경량화를 성공했다.

여주 휴게소를 출발하고 조금 달리다 보니 해가 뜨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씩 로테를 돌았다. 다들 폼이 괜찮은 것 같다. 누구 하나 페이스 떨어뜨리는 사람이 없다. 간혹 페이스를 너무 올리는 말이 나타나면 곧바로 제어 들어간다. 3차에 걸친 연습 라이딩을 통해 말 관리 노하우가 생긴 듯 하다. 노련하다.

다음 보급지인 조령휴게소가 가까워지자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근 최상의 폼을 자랑하고 계시는 요나스 형님은 지치지 않는 페이스로 치고 나가기 시작하시고 마침내 소조령 터널 안에서 팩이 갈라졌다. 꾸숑 형님께서 ‘후미 쳐졌어!’라고 소리 치셨지만, 다들 너무 힘들어지면서 말 관리할 여력이 없나 보다. 다행히 갈라진 팩은 레이닝형님이 수거하셔서 무사히 조령 휴게소까지 도착했다.

끌어재끼시는 요나스형님.
수거 담당 레이닝 형님과 수거 당하는 연비. 그러나 수거 당하는 연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조령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조령휴게소는 맛집휴게소이다. 자덕한테 맛집 추천 받지 말라던데…
꾸숑 형님의 서포트는 여기까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형님과는 작별했다. 형님의 이 은혜를 어찌 갚나.

아직 절반도 못 왔지만, 이제 로동당사 다녀오는 정도만 타면 도착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렇게 위안을 삼아 본다.

조령휴게소에서 의성 봉평면.
88km 누적 245km.
09:50 출발. 13:05 도착.

다음은 계획 상으로 가장 긴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령, 이화령을 넘어간 구긴이기 때문에 다행히 대부분 다운힐이다. 그러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도 살짝 역풍인 것 같다. 쉽지 않은 구간이 예상된다.

이번 라이딩의 유일한 아쉬움. 낙차.. 204km 지점

예천에 접어 들어 다운힐을 하는데 다운힐 끝에 로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가 조금 빠른 듯 싶었고 로타리가 각이 급해 불안하게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퍽 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고도 낙차인 걸 알고 선두를 불렀다. 우리의 에이스 1번말 요나스 형님께서 슬립으로 낙차하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전거가 거의 전손 되면서 모든 충격을 떠안고 형님은 크게 다치진 않으신 점이다.
체력 떨어진 시점에 다들 각성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아쉽지만 요나스 형님은 콜택시를 불러 복귀하실 수 밖에 없었다. (복수전 가시죠 형님. 제가 능력은 안 되고 쇼나 소가 복수전 기획할 겁니다. 그렇죠?)

편치 않은 마음이지만 목표한 바가 있으므로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하고 어찌어찌 다음 보급지에 도착한다. 가장 긴 구간이었으나 중간에 사건으로 인해 잠시 쉰 덕에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다.

의성 봉평면에서 영천 화산면.
49km. 누적 294 km.
13:43출발. 15:38 도착.

원래 계획은 70~80 km마다 보급이었으나 다들 체력적으로 힘들어진 관계로 50km 보급으로 변경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 동네는 평지라고는 없는 것 같다. 무한 낙타등의 반복. 안장통이 시작되려고 한다. 입문 후에 몇 년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다. 이 즈음에서는 꾸숑 형님도 안 계시고, 다들 힘들어서 사진 한장 찍을 겨를도 없다.
죽으란 법은 없으니 지점의 보급은 우연히 발견한 중국집. 짜장면 후루룩 마시고 숨 돌릴 틈 없이 다시 출발한다. 역시 편의점 보급에 비해 든든함이 다르다. 힘이 좀 나는 것 같다.

영천 화산면에서 언양시 모처.
73km. 누적 367km.
16:10 출발. 18:43 도착.

이제 100km만 더 가면 된다. 출발 전에 가장 걱정했던 구간이 이 곳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차량이 많아질 것을 걱정했었다. 운 좋게도 차량도 그렇게 많지도 않다. 감사합니다. 바람도 순풍이다.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신나게 달린 것 같다. 심지어 신호마저 칼 같이 떨어져서 거의 멈춤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힘든 것은 힘든 것. 안장통이 심해진다. 50km 주행 후에 보급지를 애타게 찾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예상보다 늦게 보급지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그만큼 남은 거리가 줄었다.

언양시 모처에서 부산 노포동까지.
37km. 누적 404km.
19:10 출발. 20:33 도착.

남은 구간 역시 신나게 달린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게다가 마지막 업힐 하나만 제외하면 대부분 다운힐이라고 봄날 형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물론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한 말씀이셨다. 당연히 낙타등 자그마한 업힐들 넘어야만 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제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벌써 밀려들어 살짝 흥분 상태가 유지된다.
마지막 남은 힘 짜내 마지막 긴 업힐도 영차영차 올라간다. 그 와중에 우리의 연비는 아직 힘이 남았는지, ‘나는 참치들과 다르다’라고 말하는 듯 마지막 업힐을 날아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역시 훈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노포동 업힐이 있어 오히려 극적인 라이딩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관문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듯 긴 업힐. 업힐이 끝나는 시점에 나타나는 ‘부산광역시’ 표지판이 극적인 효과를 더해 감격스럽다. 이게 별거라고 이정표 앞에서 너도 나도 사진 찍다가 번짱의 채찍질에 마지막 다운힐을 하고 라이딩은 끝이 난다.

임무 완료!

이후

열심히 끌어주시기만 하시던 소님께서는 저녁도 못 드시고 익일 출근을 위해 올라가야만 했다. 아쉬움. 우리도 식당을 찾아 약 2km를 다시 자전거로 이동해서 삼겹살 집을 찾아 폭풍 흡입을 했다. 폭풍 흡입을 하긴 했지만, 자덕에게 맛없게 느껴지는 식당이라니… 다시 자전거로 터미널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몇 잔 마시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 뒷풀이를 기대해 본다. 숙박을 하시며 2차를 달리실 형님들을 뒤로 하고 복귀파들은 다시 터미널로 향하고 버스 시간까지 긴 기다림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편맥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은 23시가 넘으면 무인 점포로 전환 되면서 맥주 판매가 중단 된다. 내가 맥주를 집어 든 시간은 23:02였다. 술 그만 먹고 얌전하게 올라가라는 계시였던 거다.
벅찬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자 마자 골아 떨어지고 긴 여정은 끝났다.

나 자신이 부산을 무박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맺으며

어려운 행사 준비해 준 쇼사마님께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모범이 돼 주시는 샤콘느, 마산아재, 코시스 5학년 3인방 형님들 덕분에 즐거운 라이딩이었습니다. 저도 빨리 5학년 돼서 자전거 잘 타고 싶습니다.
랜도너스의 천상계에서 몸소 인간계에 내려와 주신 봄날 형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이 라이딩할 때마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꿀벅지 널브로 형님, 여전한 클라스! 순간적인 밀바까지 너무 감사합니다.ㅎㅎ 똥참치 파랑나사와 근육참치 도채아빠 덕분에 라이딩 내내 유쾌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라이딩은 레이닝 형님과 소님의 엔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미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비님 총무하느라 고생 많으셨고 날이 갈수록 성장하시니 무섭습니다. 역시 훈련의 힘. 요나스 형님. 힘들게 끌어만 주시고 끝까지 함께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건강하게 복귀하시길 빌겠습니다. 꾸숑 형님의 감동적인 서포트카 정말 감사 드립니다. 리커버리 잘들 하시고 인간적인 라이딩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존엄한 죽음

2023/06/09.
결국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3주만이다. ‘모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사는 것, 죽는 것, 죽어가는 것, 살아내는 것…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신다. 살아 계셔서 고통 받고 있다. 이송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어머니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고통은 실재하지만 느끼시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고통인 것인가.어머니를 보는 내 고통은 실재하고 느껴진다.

눈 깜박 거리시고 고통스럽다고 눈물 흘리시는 거 같은데, 의식이 없으시다고 한다. 의사들 말이 맞겠지. 만에 하나 착오가 있으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을까 무섭다. 그 고통을 짧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그걸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의식이 없다시지만 어머니도 고통스럽다. 죽음 앞에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받는 것은 다행인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과정에 있는 경우에만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한다. 임종과정이란 것은 회복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한 상태라고 정의되고 있던데, 모호하다. 얼마나 가까워야 임박한 것인가. 확실히 우리 어머니는 ‘임박’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계속 고통 받으셔야 한다.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요양병원에 모신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어머니를 위한 일은 아니다.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답지 못한 일이 아닌가. 존엄한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존엄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미 그 선을 한참 넘어섰다.

이것은 폭력이다.

다르게 보면 사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버려 두고 와서 나는 잘 살고 있다.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열 살 짜리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는 1949년 전라도 함평 어느 시골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첩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첩’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에게 씨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늦둥이니까 외할아버지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씨 다른 언니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어머니와는 소식을 끊고 살았다.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르지 않으신 외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정도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큰 오빠는 어머니와 20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시기가 되자, 그 오빠의 자식들, 그러니까 조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큰외삼촌은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술이 과했고 도박을 했다. 외할아버지 사후에 집안은 날로 기울었다. 나의 어머니는 기울어져 가는 집의 군식구였던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에 하루도 가본 적이 없으셨다.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일을 잘 못했거나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억울하게 오빠와 올케에게 매 맞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10세 전후에 가출을 하셨다. 집안일에 실수를 했는데, 매 맞을 일이 두려워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을 목적지도 없이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걸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셨을지 보지 않았지만 눈에 그려진다.
피로와 허기에 지쳐 길가에 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우연히 지나던 청년이 발견했다. 청년은 광주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 청년을 따라 광주로 오게 됐다. 그 청년이 하숙하던 집에 식모 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내 어머니를 그 곳에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범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1960년 즈음에는 선의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하숙집 식모로 일했으나 억울하게 매 맞거나 굶을 일은 없었다. 하숙생 중에는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신데, 읽고 쓰실 줄 아셨다. 아마도 그 대학생 덕분일 것이다. 광주에서 식모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매 맞으며 사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 제과점에서 일했다. ‘프린스 제과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제과점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를 어여삐 보시고 잘 챙겨 주셨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프린스 언니’라는 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찾아뵌 적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프린스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다.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버림 받고 고아처럼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의지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내 아버지는 여린 분이시다.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는 모성을 그리워하셨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할머니를 찾아 다니셨다. 장성하고 나서도 술에 취하시면 ‘울 엄니. 울 엄니’하셨다. 여린 분이셨다.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중학교를 다녀본 적은 있으셔서 어머니보다 잘 읽고 잘 쓰셨다. 어머니는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글 쓸 일이 있을 때 난감해 하셨다. 연필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생 글씨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버지께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흥이 많은 분이다. 즐길 줄 알고 놀 줄 아는 분이셨다. 멋내는 것도 좋아하시고 친구도 좋아하신다. 천성이 선한 분이시고 기회만 주어졌다면 멋진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 분이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주방장 일을 하셨으나 자주 주인과 싸우고 일을 쉬셨다. 어머니는 항상 ‘쪼들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프린스 언니’는 어머니께 큰 돈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월세로 시작하면 힘드니 전세방을 구해라’라며 주셨다고 하니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돈이 사라지는 데는 얼마 안 걸렸으리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리어카 포장마차 일도 하셨고 노점에서 고둥, 번데기 등을 파는 일도 하셨었다.
하루는 하교길에 어머니 고둥 장사하시는 자리를 찾아 갔었다. 어머니는 당시 취학 전인 내 동생을 데리고 노점에서 고둥을 팔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데 어머니는 고둥 다라이를 급하게 챙기시고 동생 손을 잡고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고 나는 어머니를 찾아 불렀다. 그 때 갑자기 억센 팔뚝이 나타나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시던 다라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당시에도 노점 단속을 했던 모양인데, 눈치 없는 내가 어머니 계신 곳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일인지 이미 아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센 남자에 맞서서 알겠다, 가면 될 거 아니냐고 싸우셨고, 나는 어머니 억센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때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면서 친척의 도움을 약간 받아 식당을 시작하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장사할 줄을 모르셨다. 언제나 쪼들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놀러 나가셔야 했다. 생계를 걱정하고 가게를 지키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영수증을 달라는 손님이었다. 글씨를 써야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게에 있을 때면 영수증 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당시 살던 단칸방은 1층 단독 주택의 옥상에 불법으로 가건물을 올린 것이었다. 집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의 재질은 합판에 스티로폼을 댄 것이었다. 스티로폼이 방의 안쪽으로 대어져 있고 다른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내가 주먹으로 툭 치면 안으로 푹 꺼지고는 했다. 그게 재밌어서 벽에 수 없이 구멍을 내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래도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다. 변변한 부엌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썼었으나, 단칸방 한 구석에는 자랑스럽게 8비트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찾아 왔었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외할머니를 뵌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 찾아 오셨는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외할머니는 사변 때나 있을 법한 판자집에 살고 있는 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 날 어머니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으셨다.
식당이 잘 안 되자 아버지는 보험설계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그러다가 무허가 건물이었던 식당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결국에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른 식당에 품을 팔러 나가기 시작하셨다. 중간 중간 다른 장사를 시도했으나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은 아니셨다. 자본이라고는 없었고 남의 돈 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에 다시 어머니가 식당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동생의 아침을 챙기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챙기셨고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항상 잠이 부족하셨고 뼈마디가 아프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험하게 일하시는데 아버지는 양복 입고 설계사라고 돌아다니시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아버지 설계사 수입은 당신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그렇지만 염치는 있는 편인가 보다. 어머니 일하시는 것만큼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그만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환갑이 지나셨을 때이다. 아들들도 가정을 꾸리고 그제서야 남편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많게 되었다. 어찌어찌 1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하셔서 화물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적성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유로운 성격의 내 아버지는 제대로 된 가정, 학교에서 길러지지 못했고,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젊고 흥이 많아 조그만 가게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트럭 몰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생계의 부담을 덜게 되셨다. 언젠가 내가 갓 취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트럭 하나만 해 달라고 하셨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고생만 시키더니 아들 취직하자마자 손을 벌리는 모습에 화를 내고 무시해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 있었더라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더라면 빚 내서라도 트럭 한 대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는 그만한 빚을 낼 용기도 없었다. 생활고는 손톱만큼 남아 있는 용기도 빼앗아 버린다.
어머니는 평화를 찾으신 것 같다. 그래도 아들들은 무심했고, 어머니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이 가난해 네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자꾸 그런 말씀 마시라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일하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와 애틋한 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민에 가깝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늙어가셨다. 이제 일 하시지 않아도 되니 늙어도 된다는 듯이 급하게 늙어가셨다. 겉모습도 늙으셨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저런 분들이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 이른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전화 드리기로 마음 먹고 받지 않았으나 여러 번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다. 어머니 관련한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의식이 없으시고 119로 응급실로 가고 계시다고 했다. 택시가 잡힐만한 곳까지 가는 데 1시간 가량 걸렸다. 택시를 탄 곳은 양주 시청 근처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뇌출혈이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고대안산병원까지 꽤 긴 거리였다. 그러나 택시 안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 병상이 수술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모습은 충격이었다. 정말로 의식이 없으셨다. 눈은 반쯤 뜨고 계셔서 초점이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삭발해 놓은 모습에 놀란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 무슨 일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은 두 시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드셨다고 한다. 나도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도 나는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설렁탕 한 그릇 뚝딱 먹었다. 평소처럼 깍두기 국물도 넣어 먹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따로 듬뿍 넣어 드신다. 여태 서로 같이 마주하고 먹은 적 없는데도, 먹는 방법은 똑같다 생각했다. 갑자기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초적 욕구가 지배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 후에 담당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암울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30일 생존률이 30%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슬프다기보다는 분한 감정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한 친구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인생을 평가하느냐고 말했다. 훌륭하게 사셨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 깨어나실 거라고 믿는다. 어설프게 찾아 본 숫자들을 조합해 본 결과 지금 시기까지 더 나빠지지 않으셨으면 깨어나실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어머니 삶이,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쓴 후 며칠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모양이다. 보수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깨시는 건 어렵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동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큰아들만 어리석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어머니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다 쓰고 보니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연들 모르고 그냥 아무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잊혀지기에는 억울하다. 비참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들 둘 부족한 것 모르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삶이시다. 그리고 아들 둘 기른 것만이 어머니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해서 우리 어머니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The First Slam Dunk

명작이라 할 만 하다.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하여 원작의 일부 스토리를 보강한 정도로 플롯은 단순하다. 조금은 과하게 신파조로 흐르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플롯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장면마다 완성도가 높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감동을 오가게 만드는 구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된 듯 하다.
도입부부터 완벽했다. 등장 인물들이 차례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 자신이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후반 부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과 몇 분 간의 정적 또한 완벽하게 압도적이다.

다만, 원작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다만 내 또래의 아저씨들은 다들 훌쩍 거리며 극장을 나서게 된다.

소년 시절로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궁평항 라이딩 후기 – 이런 것이 불행 중 다행

자전거를 타다가는 심각한 부상 또는 사망의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라고 한다.

로드 바이크 입문 후에 두 번의 낙차 경험이 있었으나 모두 빗길 자빠링이었고 그렇게 고속 주행 중은 아니었다.
이번에 당한 낙차처럼 아찔한 순간은 처음이다. 상세히 경위를 기록해 두어 앞으로 안전 라이딩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화성시 마도산업단지에서 궁평항에 이르는 길은 마도미개통로라고 불리우는 13km가 넘는 평지 구간으로 속도를 내기에 좋은 구간이다. (실제로는 개통된 도로이다.)

2022년 8월 15일 광복절 약 20여명의 팩으로 이 구간을 포함하는 코스를 라이딩할 계획이었다.
남서풍이 매우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역풍이다. 마도에서 궁평항까지 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250W 파워를 내도 30km/h를 넘기기 쉽지 않았다. (내 몸무게는 62kg이고 ftp는 230w 정도이므로 한계영역에 해당하는 파워이다.) 그런 역풍을 뚫고 13km를 행군하다시피 라이딩하고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당연히 돌아갈 때의 순풍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마련이다. 복귀 길은 50km/h 넘게 나오겠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인원 수가 많고 오픈 구간이므로 자유롭게 달릴 것인데, 역풍에 대한 보상으로 다들 속도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는 팩에서 흐를 것이 두려웠다.

채 2km를 가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어이 없게 혼자서 왼쪽으로 구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원인은 노면의 세로 홈이었다.

원래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폭우 후에 망가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로드 바이크로서는 치명적인 세로 방향 홀이 있었고 거기에 딱 걸려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홀을 피하지 못하고 낙차까지 이어지게 된 원인을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

다른 블랙박스 화면을 보면 우측에 작업하는 트럭이 보인다.

자전거는 우측 차로로 주행하게 돼 있으나, 이 트럭으로 주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좌측 차로로 나갔다가 다시 우측으로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픈 상황이었기 때문에 열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서 좌우로 주행 라인이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홀과 겹치게 된 것이다.
또한 속도가 매우 빨랐다. 스트라바 기록으로 보면 낙차 직전 속도가 43 km/h로 돼 있다. 게다가 드래프팅을 하기 위해서 간격을 좁게 주행하고 있어서 홀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서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으로 영상을 자세히 보면 내가 우측에 홀을 가리키는 신호를 하는 것이 보인다. 내가 걸려 넘어진 홀 우측에 다른 홀이 있어서 거기에 시선이 쏠리고 후미에 주의를 주느라 내 앞의 홀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앞 사람의 홀에 대한 콜이 없었다. 이 날 전반적으로 콜이 없었는데, 다들 속도감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리고 오픈 상황일수록 콜을 잘 해야 될 거 같은데 힘들어지면 오히려 다들 소홀해지는 경향을 자주 본다.
이런 모든 원인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정확하게 걸린 것은 불운에다가 노면 주시를 게을리한 나의 과실이 겹친 결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첫째는 내 뒤에 오던 일행 중에 가티 낙차에 휘말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매우 빠른 속도였음을 감안하면 기적적인 일이다. 영상에서도 보면 간발의 차이로 피한 것을 볼 수 있다. 피했다기보다는 피해졌다고 봐야 되는데, 내가 왼쪽으로 구르면서 자전거는 바닥에 부딪히며 튀어 올랐는데 그 때 휠이 지면에 수직으로 튀어 올랐던 것이다.
둘째는 빠른 속도의 낙차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을 둥그랗게 만 상태에서 굴러서 충격이 최소화 됐다. 운동신경이 둔한 편인 나로서는 또한 기적인 일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뭐냐. ftp가 향상 되고 VO2Max가 높아졌다고 고수가 아니다. 노면 주시 게을리한 나는 아직도 자린이었다고 반성해 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정도 부상으로 싸게 막은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안전한 라이딩, 즐거운 라이딩 천년 만년 즐겨 보자.

P.S.
소중한 시간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보살펴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감사한 말씀 드립니다.
우헤헤님 특히 너무 잘 케어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소식 듣고 걱정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나의 애마는 휠 스포크가 한 개 나가고, 왼쪽 레버가 갈리고 바테잎 너덜너덜해진 정도의 피해인데 이미 이틀 만에 수리 완료 됐습니다.
나의 몸은 양 무릎, 팔꿈치, 어깨에 다양한 깊이의 찰과상이 있는 정도이고, 가슴팍에 통증이 있는 정도입니다. 아마도 가슴팍은 핸들바에 부딪힌 거 같습니다. 앞으로 1주일이면 라이딩 가능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간디가 말하는 행복 – 어쩌다 보니 일기

Happiness is when what you think, what you say, and what you do are in harmony.

행복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조화로울 때이다.

Mohandas Karamchand Gandhi

오늘(2022/07/26) 아침 블룸버그 단말기에서 만난 격언이다.

간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거짓 없이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내면의 평화를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나는 내면의 평화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한다면 적어도 내 안의  모순에 의한 갈등, 번민 등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의 모토 중 하나인 ‘담백하게 살자’와 상통하는 말이다. 내가 아닌 나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부풀리는 일에서 인생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 생각이 말할 수 있는 생각이어야 한다. 부끄러운 생각, 나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생각과 말이 조화롭게 하는 것은 결국 내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 된다.

말이 행동과 조화롭게 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게을러지기 십상이다. 게을러지는 것은 유전자에 박혀 있는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은 정도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의 동물의 뇌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부끄럽지 않은 가치관을 갖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려면, 깊이 읽고 생각하고, 취하지 않고 (그것이 술이든, 약이든, 허튼 사상이든) 찬 물에 세수한 듯 깨어 있는 채로 살아야 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읽고 생각하고 끄적이는 짓을 반복해서 생각나는 대로 살지는 않도록 하자.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강화도 라이딩 – 2022/07/23

오늘 라이딩 일정은 05:00 쌍개울 출발,(신정교 05:30 2명 합류) 봄날님의 강화도 코스를 맛본 후 17:00 쌍개울 복귀하는 계획입니다.
우리 집의 최고 존엄께서 16시 외출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 전에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살짝 무리한 일정 같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용서 받는 쪽을 선택하고 라이딩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04:00 기상합니다.
일찍 일어나서 커피와 아침을 먹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경량화를 시도합니다.
경량화의 성공 여부가 그 날의 라이딩 컨디션을 좌우하지요.

05:00에 집을 나서 05:15 신정교 도착합니다. 좀 일찍 도착했습니다. 앗! 심박계가 잡히지 않습니다. 신정교 기둥 뒤에 숨어서 심박계를 벗었다 찼다 해보는데, 쇼사마님께 딱 걸립니다.
“왜 거기서 옷을 벗고 계세요?”
“아니, 그게 어버버버…”
심박계 없이 라이딩합니다. 이 정도는 사소한 해프닝이지요.

쌍개울 출발이 순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약 30분 이상 늦어지는 것으로 예상되고, 번짱이신 쇼사마께서는 교통 상황, 오후의 비 예보 등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고 존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번에는 용서 받지 못하는 것 아닐까…’

정시 출발은 실패

06:00 쌍개울 출발 팀과 합류합니다.
멀리서부터 소님께서 강력하게 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원 수가 꽤 많습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꼬리에 붙어서 열심히 달립니다.
아마도 늦은 시간을 만회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만, 방화대교에서 멈춥니다.
음, 보급하기에는 살짝 이른 시점인데 이상하다 싶었는데… 마산아재님께서 안 보이신답니다.
10분 이상 후에 아재님께서 거친 숨을 내쉬며 도착하셔 버림 받은 설움을 토로하십니다.
전화 받는 사이에 (이 전화는 쇼사마님이 출발을 독려하려 걸었던 걸로 판명) 팩이 출발해 버렸다는 겁니다.
“먼저 가라 하셨습니다.” 라는 증언은 의사소통 오류였던 것입니다. 여튼 여기서 10분 지체.
그런데, 이렇게 기다릴 거면 그렇게 페이스 올릴 필요가 없었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앗 그런데 또 하나 걱정거리가 떠오릅니다.
강화인삼센터에서 조인하기로 한 분들은 점점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역시 지체 않고 달려야겠습니다.

김포아우토반.
때려 밟기에 딱 맞는 감동적인 구간이죠.
오픈 신호 받자 열심히 밟아 보았으나, 역시 성냥개비만 태우고 BA는 실패. 결론을 알면서도 항상 이 짓을 합니다.
오늘은 그린 저지를 입었으니까 시도해 볼만 했습니다.
마주 오는 MTB가 좌측 통행을 하는 것 정도는 아주 가벼운 해프닝.


김포에서 강화로 가는 공도 구간.
역시나 차량이 좀 많습니다만, 2열로 질서 있게 갈만합니다. 순조로운 듯 보입니다.
팅이라그님의 전조등이 발사되고 그것이 샤콘느 형님 다리를 맞은 후 실종된 것은 아주 아주 아주 사소한 해프닝.
신호대기에서 출발하는 순간, ‘푸쉬쉭’ 소리가 들립니다.
펑크임에 분명합니다. 쇼사마님의 펑크네요. 튜블러. 아 골치 아픈데.
타이어 상태를 보니, 지금 터진 게 다행입니다.
이것은 펑크가 아니라, 타이어가 닳아서 없어지기 직전입니다.
“보통 타이어 한 번 갈면 1만 킬로씩 타는 거 아닌가요??”

번짱 사수 실패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코스의 설계자이신 봄날님께서 계시니까요.
봄날님 믿고 번짱은 버리고 우리끼리 출발하도록 합니다.

다시 열심히 달려, 차량들과 부대끼며 강화대교를 건넙니다.
건너자마자 인삼센터가 보이는데… 합류하기로 한 일행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뿔싸, 초지인삼센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강화에는 인삼센터가 두 개. 최근에 항상 초지에서 기다렸으니 그 쪽으로 간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초지에서 강화인삼센터까지 차로 20분.
초코정님과 박사일기님을 기다리며 화기애애 담소 타임을 갖습니다.
우리도 늦게 출발했으니 비긴 걸로 합니다.
덤앤더머?막하막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2

우여 곡절 끝에 이제 강화도 한 바퀴 돌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애초에 계획했던 코스의 수정은 불가피합니다.
길을 잘 모르니 대충 짐작으로 이해합니다.
아마도 교동도를 생략하기로 하신 모양입니다.
‘아 어쩌면 용서 받을 수도 있겠구나.’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이제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민통선을 통과하고 오른쪽 철책을 끼고 쭉 뻗은 길이 나옵니다.
김포아우토반 찜쪄 먹는 때려 밟아라 구간이네요.
한 번 와 본 구간이지만, 반대방향이었습니다.
역시나 봄날님께서 오픈 신호를 주시고 다들 참지 못하고 성냥개비 태웁니다만.. 결론은 항상 같죠.
침 좀 흘리면서 달리다 이제 좀 그마안~이라는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오픈 구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후미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두시맨님 쌍 펑크가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튜브를 누가 두 개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튜브를 들고 석수님께서 두시맨님께 내려갑니다.
우리는 또 하하호호(데이빗의 하하호호와는 다릅니다) 담소 타임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사라지면, 나중에는 몇 명이 남는 걸까?
공포 영화의 상투적인 시나리오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클린처라 복구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기다리지 않고, 보급지에서 세팅해 놓고 기다리기로 합니다.

교동도는 생략하지만, 교동도 입구의 편의점에서 보급을 하기로 합니다.
역시나 강화도는 낙타등이 많습니다.
다들 휴식 시간이 길어서 힘이 남으시는지, 달리는 동안에는 인터벌 치십니다.
아… 좋습니다. 하하호호.
팩에서 떨어지신 분들 몇 분 계시고, 봄날형님께서는 갈림길에 후미 담당을 남겨 두십니다.
길이 좀 헷갈리는데 다들 제대로 합류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됩니다.
편의점에서 보급하는 동안 너무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걱정이 현실이 되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니다.
그러나, 소님, 두시맨님, 석수님은 펑크를 이겨내고 성공적으로 복귀하셨습니다.
길도 제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참으로 개선군의 모습입니다.

펑크 대처 성공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쇼사마님도 복귀하셨습니다.
동생분의 차를 호출하시고 잠들어 있는 샵 사장님을 깨워 타이어 교체하신 겁니다.
역시 개선군의 모습입니다.

펑크 대처 성공 #2(?)

역시 교동도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시 출발합니다.
강화도 현지인의 자부심으로 고인돌 구경을 갑니다.
큽니다. 신기합니다.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한 번짱님의 계획이었던 거 같습니다.

고인돌을 뒤로 하고 시골길을 한참 달립니다.
여기도 사진 흥벙을 위한 번짱님의 계획 구간인 듯 합니다.
경치 좋고, 한적하고, 시골길 주제에 포장도 잘 돼 있습니다.
사진 잘 나오는 구간입니다.

고수는 포즈부터 다릅니다.

번짱님은 사진찍기 의무에 충실하시고 어쩌다 보니 제가 선두가 됐습니다.
‘어라, 길 모르는데… 코스 파일하고 길도 다르네.. 어쩌지…’
괜찮습니다. 바로 뒤에 봄날님께서 조종을 해 주십니다.
‘좌회전, 우회전, 다음 좌회전’

한참 달리는데, 뭔가 순탄치 않은 것 같습니다.
봄날님이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십니다.
뒤돌아 보니, 팩 숫자가 줄어 있습니다.
번짱님도 없네요. 하하하.
이 길이 아니라고 외치시는데, 앞에서 못 들었던 겁니다.
결국 조양방직 앞에서 기다리기로 합니다.
우리의 하하호호 타임은 다시 시작 됐습니다.
여기서도 한 10분 대기 후에 찢어진 그룹 합류합니다.
마침 그 무리에 아재형님도 계시네요. 거친 숨 몰아 쉬시며,
“나 오늘 두 번 버림 받았어!” 하십니다.
번짱께서는,
“자아 번짱 버리신 분들은 다 머리 박으세요~” 하십니다.
머리 박는 거 대신 이 후기 쓰는 걸로 쇼부..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3, 번짱 사수 실패 #2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 다시 다 모였으니까요.
이제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고려산 넘고, 낙타등 넘습니다. 밥도 먹었지요.
강화도 3대 카페는 지나쳐서 CU에서 대신했습니다.

역시 중급이라고 흐르시는 분들 안 챙기더군요.
저는 초급 마인드라 흐르시는 분들 계시면 스위핑하고 싶어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살짝 갭 벌어진 것도 좁히는 게 쉽지 않네요.
프로 선수들 BA 치는 것도, 추격하는 것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10미터 정도 갭 벌어진 사이로 트럭이 들어오는 바람에 급브레이크를 잡아 석수님하고 추돌할 뻔 한 건 조금 큰 해프닝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자린이 같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 생각을 했어야 되는데, 손가락이 먼저 반응하고 아차 싶었습니다.

복귀길은 비교적 순탄합니다.
새하얗게 태우신 분 몇 분 계시지만,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비가 올 거 같은데,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좀 빨리 가야겠습니다.

저와 쇼사마님은 신정교에서 이탈해서 목감천을 타고 복귀합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많이 맞지 않았네요.
‘그래 비까지 맞으면 너무 잔혹하게 사건 사고가 많은 거지.’

그러나, 쌍개울 복귀하시는 분들은 비 쫄딱 맞으셨더군요.
완벽하게 다사다난한 라이딩이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어느 분도 오늘 라이딩 후회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이딩은 언제나 즐거운 거니까요.

오늘 라이딩 준비하신 쇼사마님 감사 드리고, 다사다난하고도 즐거운 라이딩 위해 애써 주신 모든 분들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아 참, 마지막으로… 최고 존엄께서는 관대하십니다.

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